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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2. 12世 〉17. <부정공>통덕랑공휘협묘갈명(通德郞公諱莢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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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정공>야은처사휘간묘갈명(野隱處士諱侃墓碣銘)
野隱處士諱侃墓碣銘 麗川郡三日坊蟹池原枕艮而如堂斧者故處士玉川趙公諱侃字而直之藏也歷年三百顯刻尚闕後孫懼無以戒草牧之碣于阡道就中膺烈其主鬯也會族丈文而吿之曰積世未遑今始之擧不容無若而陰記而世遠籍缺當日事奈如杞宋之歎何但竊聽家達一二口述則有之盖府君氣魄幹局惟自過人時値龍蛇之燹堂有雙親無他兄弟則惟奉老避寇之是逐後先辭境内諸公如張忠毅公成武靖許川募義之初故一生慷慨自號野隱云盖影響於曾年狀草煨燼之餘者不過如此疇能信而張之以眿來許也以余寅錫爲宗黨怦其再侄在玉重硏來問余作而應曰尚聞父子之間非容僞之地何也近以莫矯也後孫之於祖先或戒其誣何也遠而易眩也噫假使夜隱公事行匪傳於昔而惟今之出則人將疑信至若前輩手錄因作家庭遺譚一世二世至于十世之久是乃口碑也據口碑而書諸豊碑自爲實蹟而此其大者一班之窺可以盡全豹一臠之味可以推全鼎何必多乎哉公即莊陵節臣節愍公諱崇文六世孫以上姓系名德已詳屢世狀碣故略之概言其近講藝院習讀諱繼珩曾祖也崇仁殿參奉諱信大父也僉知中樞諱夢説皇考也金海許氏習讀國女母夫人也萬曆丁卯崇禎辛未其生卒而三月十三日諱辰配昌寧成氏主簿應祺其考也葬同原異兆擧二男二女男元謙克謙丙子有義蹟克謙蔭軍資監直長徐景慄奇慶門孫曾内外男女多至二十二人而武司果晉亨長房生進士松年次房後嗚呼公挺生世篤忠貞之家不負皇天付畀之性而沈湮畝壟蓬蒿之下曾不少試野隱之稱不亦宜乎是爲之銘曰江次翁負母逃難溫太眞絶裾赴義未知有尚論軒耶蓋亦觀夫所處之地後百世駐馬讀碑者以此想像則公之爲人庶可得矣 歲甲子黃華節下浣 傍裔寅錫謹撰 而公不應乃從家亨元謙與進士時一時述安經歷瑢金廷斗等諸公唱義進至礪山聞已講和約成自罷兵而歸 「湖南倡義錄」 야은처사휘간묘갈명(野隱處士諱侃墓碣銘) 여천군(麗川郡) 삼일방(三日坊) 해지원(蟹池原) 간좌(艮坐)에 자리잡은 당부(堂斧)처럼 생긴 자리는 고(故) 처사(處士) 조공 휘(諱) 간(侃), 자(字) 이직(而直)인 분의 무덤이다. 三백년이 지나도록 비석(碑石)이 없어 후손들이 나뭇꾼들을 경계(警戒)할 수가 없을까 걱정하였다. 중년에 응렬(應烈) 군은 그 종손(宗孫)인데 족장(族長)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여러 대 동안 미처 세우지 못한 비석을 이제 세우려 하면 음기(陰記)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세대가 멀어 기록이 없어서 당시의 사적이 없어진 것이 탄식스럽다. 다만 집안에 전해오는 몇 가지 사적은 있다. 대개 부군(府君)께서는 기백이 뛰어나고 일처리가 남다르셨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집안에 노부모님이 계시고 다른 형제가 없어서 노부모를 모시고 적(敵)을 피하는 것이 급하여 뒤따라가기로 하고는 먼저 경내(境内)의 의병장(義兵將)인 충의공(忠義公) 장윤(張潤), 성무정(成武靖), 허웅천(許熊川)이 의병으로 나가자는 권고(勸吿)에 응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평생 동안 이를 한스럽게 생각하여 호(號)를 야은(野隱)이라 하셨다 한다. 대개 옛날의 글들이 불탄 나머지 지금 전하는 것은 이에 불과하니, 누가 공의 사적을 믿어서 능히 잘 훌륭하게 써 후세에 전하겠는가.」 하고는 나 인석(寅錫)이 종인(宗人)이라 하여 그 종질(從侄) 재옥(在玉)과 중연(重 研)을 시켜 이에 대해 물었다. 나는 이에 대답하기를, 「나는 일찍이 듣건대 부자(父子)간에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는 왜 그러느냐 하면 가까운 사이여서 속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후손이 그 조상에 대하여서도 속여서는 안 되니, 왜냐하면 세대가 멀어지면 쉽게 현혹되기 때문이다. 아, 설사 야은 공의 사적이 예전에 전하지 않던 것이 지금 나왔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지만 선배(先輩)들이 직접 쓴 것을 인하여 집안에서 말로 대대로 전해 와서 오래된 사적은 바로 구비(口碑: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碑文)인 것이다. 그 구비(口碑)에 의해서 비석에 새긴다면 이는 실제의 사적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공의 사적 가운데서 큰 것의 하나일 뿐이니, 여기에서 다른 일들은 엿볼 수가 있는 것이요 이른바 고기 한 점만 맛을 보아도 한 솥 안의 고기국 맛을 미루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많은 사적이 전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공은 바로 단종(端宗)의 절신(節臣)인 절민공(節愍公) 휘(諱) 숭문(崇文)의 六세손이다. 그 이상의 선대에 대한 가계(家系)와 명덕(名德)은 이미 여러 선대의 행장(行狀)과 비문에 자세히 나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省略)하고 가까운 상계(上系)만 적자면 강예원 습독(講藝院習讀)을 지낸 휘 계형(繼珩)이 증조(曾祖)이며, 숭인전 참봉(崇仁殿參奉)을 지낸 휘 신(信)이 할아버지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은 휘 몽열(夢説)이 아버지이시며 김해허씨(金海許氏)로 습독(習讀)을 지낸 허양국(許讓國)의 따님이 어머니이시다. 공은 융경(隆慶) 정묘년(一五六七)에 태어나시어 숭정(崇禎) 신미년(一六三一)에 돌 아가셨는데, 三월十三일에 돌아가셨다. 배위(配位)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주부(主簿) 성응기(成應祺)의 따님으로 묘(墓)는 같은 언덕에 따로이다. 二남二녀를 두었는데, 아들 원겸(元謙)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의병(義兵)을 일으켰으며, 극겸(克謙)은 음보(蔭補:조상의 功勳으로 벼슬하는 일)로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을 지냈다. 사위는 서경률(徐景慄)과 기경문(奇慶門)이다. 내외 손자(孫子)와 증손(曾孫)은 二十二명이나 되도록 많은데,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사과(司果)를 지낸 진형(晉亨)은 큰아들 소생이요, 진사(進士) 송년(松年)은 작은 아들의 후손이다. 아! 공께서 대대로 충정(忠貞)한 집안에서 태어나 하늘에서 품부(禀賦)받은 성품(性品)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초야(草野)에서 가난한 생활을 감수하고 사셨으니, 야은(野隱)이란 칭호가 걸맞지 않은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강차옹(江次翁)은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였고 온태진(溫太眞)은 옷소매를 끊고 전쟁터에 나갔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그 경중 말할 수 없으니 그 처자에 따라서 하기에 달려 있네. 백세후 말 세우고 이 비문 읽는 사람은 이로써 상상해 본다면 공의 사람됨 알 것이네. 甲子年九月下旬 傍裔 寅錫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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